일제에 맹렬히 항거한 애국 독립투사의 아내는 일본인

어려운 시기일수록 역경을 딛고 피어난 사랑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어려웠던 일제 식민 시절, 국경을 넘어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연인이 있다. 바로 독립 운동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박열, 그리고 그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이다.

 

1902년, 박열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가난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시기였다. 박열이 아직 고등학생이던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독립을 외치는 범국민적인 3.1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박열은 고향 경상북도 문경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일본 정부에 항거하는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너무 심했고 결국 그는 한국이 아닌 본거지인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도쿄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한편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의 가난한 가정집에서 태어났다. 호적에 오르지 못해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부모는 그녀를 거의 버린 자식 취급했다. 조선(한국의 당시 명칭)으로 건너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갖은 멸시와 학대를 받았다. 결국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키로 결심했다. 그리고 도쿄의 한 어묵집에서 일을 하면서 당시 한국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네코는 <조선 청년>에 실린 한 시를 보고 벼락을 맞은 듯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다소 거친 이 시의 제목은 “개새끼”, 시의 저자는 ‘박열’이란 한국 청년이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중략)

 

단지 시 하나만 보고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한 조선 남자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 가네코. 운명이었을까. 곧 두 사람은 일본 현지에서 만나 함께 무정부주의 사상을 토로하며 깊은 교감을 나눈다. 조선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의 힘겨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21년 11월 29일, 두 사람은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는 등 함께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운동을 진행했다. 

 

1923년 9월 1일, 도쿄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정부는 혼란스러운 민심을 이용해 이용해 평소 가시 같은 반정부 시위자들과 항일 운동 조선인들을 잡아들이고자 했다. 물론 이 중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박열은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혼자 한 짓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도 공범이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판사는 일본인인 그녀가 그저 조선인 남자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된 것이며,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면 용서를 해주겠다고 계속 회유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던 가네코는 재판장이 떠나가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우리 둘이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그와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설령 당신들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나는 절대로 그 혼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1926년 2월 26일 사형 선고 후 일본 이치가와 형무소에 수용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하지만 이조차 두 사람의 사랑을 막진 못했다. 심지어 이 연인의 애틋한 마음에 감복한 판사(다테마츠 카이세이)는 둘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특별히 허락하기도 했고, 심지어 박열의 어머니에게 며느라 가네코 후미코를 소개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도 먼저 제안했다.

비록 두 나라는 적국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주위 사람들의 가슴까지 흔들 정도로 강렬했다. 간수들의 배려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당시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혼인 신고서를 정식으로 작성하며 옥중 결혼식을 올렸다.

사형을 면한다는 일본 정부의 제의 조차 갈가리 찢어버리며 뜻을 굽히지 않았던 부부는 결국 각자 다른 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헤어진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박열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가네코 후미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오열했다. 그러나 자살은 공식적인 사안이었을 뿐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일본 형무소 당국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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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가족들의 배려로 박열 가계의 선산에 묻혔다. 22년 뒤 석방한 박열은 6.25 전쟁 후 북한에 끌려간 뒤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1974년 70세의 나이에 평양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아내 가네코의 기일이면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녀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형무소 수감 기간 동안, 가네코 후미코는 '나는 나'(원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옥중수기를 작성했다. 그녀의 글에서, 불우한 어린 환경과 세상의 압박에 맞서며, 식민지 조선인을 누구보다 깊이 사랑한 일본인 여성의 모습과, 이와 동시에 국적과 성별을 떠나 그저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 살고 싶었던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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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와 함께 죽을 것이다. 나 자신을 희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가네코 후미코의 말처럼,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남자를 사랑했고, 한 떨기 붉은 꽃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다 시대의 억압에 쓰러졌다.

박열 역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불굴의 독립투사였지만, 적국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를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다.

죽음마저 갈라놓지 못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비록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진 못했어도, 이젠 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하지 않을까.

아래 영상을 통해 비운의 연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한국어).

 
2018년 3월 1일은 대한민국의 국경일이다. 99년 전, 1919년 3월 1일, 우리의 조상들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했다.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쓰러져 간 조상들의 투쟁과 독립 의지 덕분이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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